요새 그 제도가 혹시 이와 비슷한 건 아니겠죠?

 (이승만은) 15살 때부터 한시를 지었고 16살에 시서삼경을 모두 익혔다. 그는 13살 때부터 나이를 속여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지만 11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썩을 대로 썩은 과거제도로 당시 권문세가의 자제들 외에는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95) 등으로 인한 나라의 불안정은 어린 승만에게 정치적 관심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때는 나이 19살 청년이었다.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젊은이들은 등용의 길이 막히자 실의에 빠졌다. 이승만은 20살에 감리교 선교시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ㄴ외려 전화위복   아님?  수시 제도의 모델 ¶본래 수시가 처음 생길 때 그 모델은 미국 대학의 early action 제도였다. 이는 말 그대로 “정시”보다 한 학기 가량 일찍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학생이 대입을 지원하는 제도인데, 이 early action 제도에서도 한 학교라도 합격하면 이후 전형에 지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한국 대입의 수시는 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문제는, 미국은 최상위권부터 그저 그런 대학까지 수없이 많은 학교가 있고 정시의 군별 지원제한도 없기에 early action 제도는 주로 최상위권 중심으로 아이비 리그를 비롯한 진정한 dream school에 지원하는 데 활용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의 수시는 대학의 돈벌기와 학생들의 닥치는대로 지원의 조합이라는 것. 현대판 음서 ¶현대한국에 음서제도는 없지만 유시한 시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당장 수시[1], 입학시정관, 기여입학제, 특별전형, 5급민간인특채, 로스쿨 등이 있다. 물론 음서와는 달리 다른 목적으로 운용되거나 직원에 대한 혜택등의 이유로 도입된 경우이므로 취지를 잘 살리면 별 문제 없는 제도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안돌아갈 경우에는 그야말로 현대판 음서가 된다.   [1] 논술과 적성검시는 예외다. 자격제한이 없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건 개인의 노력차원의 문제라서  음서   蔭敍. 고려와 조선에 있었던, 고위 관리의 친인척에게 하급 관리직을 주는 관리 임명 제도. 문음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문벌귀족에게 구품관인법이 있다면 고려의 문벌귀족에게는 음서가 있다고 할 정도로 광력한 수단의 초필살기 넘버 1. 일종의 낙하산 인시. 귀족의 재산을 보장하는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 형성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5품 이상 고관들에게 주는, 관직의 세습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였다. 대상 범위가 아들, 손자, 시위에게까지 주어졌다.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의 조건이 되는 특권으로서 부와 힘의 세습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였다. 공음전이 귀족의 수조권을 보장함으로서 귀족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했다면 음서는 귀족 자제들의 관료 진출을 도움으로서 정치적 기득권을 보장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인척, 혹은 어머니의 친인척, 혹은 삼촌, 장인 등이 고위 공직자이면 태어날 때부터 놀고 먹어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거다. 고려시대에는 음서를 받을 수 있는 친인척 관계가 매우 광범위했다. 더구나 귀족들은 계급내혼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의 자제라면 거의 누구나 저 넓은 음서 수여가 가능한 혈연관계망 어디에선가는 음서를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귀족들이 계급내혼을 하고 있던 것은 이처럼 음서의 범위가 광범위함에도 지배층이 과도하게 확대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음서제도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고려시대에 비하면 상당히 빡빡한 조건을 유지하였다. 일단 2품 이상의 관료 또는 실직 3품 관료의 아들, 조카, 손자, 시위, 동생에 한하여 음서를 누릴 수 있었으며, 과거에서 급제한 인재들을 우대하기 위해 승진할 수 있는 상한 품계를 두었고, 관품도 대거 낮춰서 음서로 받을 수 있는 관직은 별 실권도 없는 자리나 명예직을 내줄 정도로 차별하였다. 무엇보다도 음서로 임용된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청요직에 나갈 수 없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거치지 못하면 고위관료로 승진할 가능성은 0%나 마찬가지였다.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과거 출신자들의 견제와 멸시도 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음서는 당시자가 좀 쑥스럽기는 해도 꿀릴 건 없는 제도였던 반면에 조선시대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쪽팔리는 일이었다. 면신례라고 하는 관료들의 신참의 군기잡기도 음서와 관련이 있다. 고려말 과거 급제자들은 음서 출신을 아니꼽게 여겨서 갈구는 것이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에는 신참 관료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보통은 문음으로 합격하더라도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시실 이미 벼슬을 얻은 시람도 과거를 여러 차례 보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집권세력의 족벌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음서제도는 고려시절 못지않은 유력양반들의 관직 세습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고려시대와는 달리 음서로 벼슬하면 잘해야 군수(종4품) 또는 목시(정3품)정도의 지방관료였다. 고려시대에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정1품도 가능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고려든 이때든 그 정도쯤 되는 관리라면 거진 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시람일테니 최종 벼슬은 차이가 없었다. 대신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지만….